Chapter 1 : Stay in it?
Yeah.like there, like here.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AI의 기술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계에서는 2022년 주목할 만한 이슈가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에서 열린 미술대회 ‘디지털아트, 디지털합성사진’ 부분에 출품해 1등 상을 받은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이 AI 프로그램 미드저니가 그린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예술이 죽었다”라는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ed)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본질보다 그 겉포장이 중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현상들을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Simulacre Simulation)이라 명명하는데 인간들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왜 만들어 내는 것일까? 보드리야르의 일관된 생각 중 하나는 인간의 활동에 바탕이 되는 힘의 원천을 ‘욕망’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하이퍼리얼한 가상의 세계들은 인간의 욕망의 한 표현이자 극단적인 표현이다.
시뮬라크르는 문화를 소비함으로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인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서사와 이데올로기가 있는지에 따라 형성되는데, 원본의 복제(가상의 현실), 그 복제가 대체 불가의 존재, 원본을 대체하게 된다면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결국 복제물들이 점점 원본을 대체하게 되는 사회가 바로 현대사회이다. 대중에게는 사실 실재(원본)는 중요하지 않다.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2021년 6월,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에서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구찌의 디지털 가방이 무려 4155달러, 한화로 약 460만원이 넘는 금액에 판매가 되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명품 핸드백의 가치가 현실과 버금가게 책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재 거래까지 이루어졌다.
의문이 든다.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와 허구의 세계의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를 다시 봤다. 실제와 가상의 욕망의 세계(상상)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일탈은 상상에서만 머무른다. 칸트의 말대로 각성은 지능이 아닌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월터는 용기를 내고 상상 속의 공간에 머무른다. 영화 초반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명확한 구분이 되지만 주인공의 각성 이후로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간극이 점차 좁혀진다. 주인공은 드디어 무의식의 충동에서 벗어나 실재의 세계로 머무르게 된다.
바로 저곳에서, 바로 이곳에서
무릉도원에 머무르다
: 의성의 매력은 무엇인가?
의성에서 낯선 청년과 대화할때 꼭 빠짐없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 의성 분이세요? 어느 지역에서 오셨어요?”
전시에 참여하는 4명의 작가는 저곳에서 왔다가, 바로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 2023년 의성 마늘축제의 원데이클래스 부스 안에서 우리는 처음 예술활동을 함께 했다. 서로의 작업들을 공유하며 클래스를 운영하던 중 안계미술관의 김현주 관장의 제안으로 4명의 작가들이 함께 기획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왔다. 경기도 고양시, 인천시, 대구시, 경남 산청군 등 각지에서 어쩌다 이곳 의성에 왔는지, 왜 스쳐 지나가지 않고 이곳에 집을 구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수차례 회의에서 어쩌다 의성에 오게 되었는지 우리가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의성은 무(無) 맛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서 좋아요. 사람도 차도” “저는 어딜 가도 딱히 상관없어서요” 등의 생각들이 오고 갔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의성에서 각자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내 머무르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 桃花源記)>에 나오는 말로, ‘이상향(理想鄕)’, ‘별천지( 別天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이 안평대군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도원 즉 복숭아밭을 노니는 환상적인 꿈을 꾼다.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산 아래 이르니,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데 신관 예복 차림의 사람을 만났다. 어렵사리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멀고 가까운 복숭아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떠올랐다. 한 눈에 도원동임을 알아차렸다. 최항, 신숙주도 동행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즐거워하던 중,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다시 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세계를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에게 이야기했고 단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그토록 가고 싶은 무릉도원의 세계는 왼쪽에 그려진 험난한 산세를 넘어 넓고 평평한 도원으로 다다르는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꿈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의성 혹은 누군가에는
영감이 흐르는 무릉도원을 작가들은 각자의 언어로 표현했다.
Chapter 2
무릉도원 : 없거나 혹은 있거나 그 사이의 찰나
김현주 : 이 순간이 어쩌면 나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처음 그려본 복숭아는 둥글면서도 동그랗지 않았고 길고 끝이 뾰족한 잎이 무성했다. 복숭아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경우 겹친 그림자의 색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철마다 즐겨 먹던 복숭아가 이렇게 힘든 모양이었나? 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 내 눈이 어떻게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고 관계를 만들고 색을 선택하는지가 행위의 주된 관심이다. 겹겹이 쌓이는 오일의 물성이 환영 비슷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좋아한다.
Colorless Peaches는 꿈속 무릉도원을 방문했을 때 손 내밀어 따먹을 나만의 무색무취의 복숭아다. 3면화로 그려진 Peach Blossoms은 구글에서 찾은 복숭아 꽃을 확대하고 잘라낸 이미지로 구성되어있다. 평소 쓰지 않던 Cerulean Blue 와 Quinacridone Red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였다. 삶과 죽음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벚꽃이 흐드러지는 장면에 빗대어 표현한 장면은 역사 속 페인팅에도 많았고 최근 데미안허스트의 벚꽃회화 작품들도 인상적이었다. 의성에 온 초기 복숭아밭 근처를 다녀온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 자연이 지천으로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느낌. 정리 안 된 구도와 색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것들만 그리고 살아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작업했다.
Pink Freud는 200호 대형화로 얼굴 없는 사람이 복숭아꽃 만발한 나무 아래 있는 작품이다. 이탈리아 문학가 레오파르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쁘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나쁘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나쁜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중략) 유일한 좋은 것은 비존재이다.’라는 문장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무릉도원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200호 캔버스를 무리 없이 제작하는 작업실에서 이태리산 아사천과 작은 튜브당 6만 원이 넘는 시리즈8의 윌리엄스버그 유화 물감을 마음대로 낭비하는 이 순간이 어쩌면 나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 2024 김현주
노수현 : 나는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며 애정할 것이다.
분홍빛과 붉은빛이 섞인 껍질을 반으로 가르면, 노란 속살이 나오고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씨앗. 씨앗을 제거하면 움푹한 홈이 생긴다. 아무도 그 홈을 채우지 않는다. 처음부터 씨앗이 없던 것처럼 움푹한 공간을 받아들인다. 씨앗에 짓눌려 노란색이 아닌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는 그 홈을 받아들인다. 만약 반으로 가른 복숭아 속에서 씨앗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홈을 무시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자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대로 두자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복숭아가 건강한 복숭아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복숭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씨앗이 없는 복숭아를 보며 사람들은 열띤 토론을 벌일 것이다. 이 문제 있는 복숭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문제가 왜 생긴 것인지, 씨앗은 어디 간 것인지, 씨앗이 없는 저 홈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거대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할 것인지. 다른 복숭아에서 빼낸 씨앗을 억지로 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복숭아의 다른 속살을 베어내 홈을 메워버릴 수도 있다. 물을 채워 넣을 수도 있고, 복숭아와 전혀 관련 없는 생뚱맞은 것으로 메워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시행하기 위해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 얼마나 많은 인력이 들 것인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홈이 얼마나 큰 구멍이 될 것인지, 혹은 복숭아 스스로 그 공간을 채워버릴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는 복숭아도 복숭아라고 말하는 이들은 씨앗을 잃어버린 복숭아가 비어 버린 공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홈을 채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복숭아 중심에 있는 그 홈이 스스로 재생되는 과정을 함께할 것이다. 노란빛 가운데 붉게 빛나는 그 공간을 나는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며 애정할 것이다. 애정의 크기가 커지면 그 홈은 더 이상 홈이 아닌 복숭아가 될 것이다. © 2024 노수현
박진영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 ‘그 곳’
어떤 장소에 머물더라도 나의 도원향은 기억 속에 있는 이곳과 저곳이 혼재한 ‘그곳’ 이다.
그렇기에 이 원본이 없는 이상향은 욕망할수록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고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에 대한 궁금증은 나의 욕망은 무엇인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곳’은 가시적이지 않기에 무한한 상상을 기대감을 때로는 공포와 무력감을 동반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내가 38년을 살고 활동하던 지역을 벗어나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 작가를 포기했음에도 표면적으로 나는 작가로 불렸다. 나의 작품들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듯 나는 과거의 나를 복제해서 머물렀다. 이곳에서의 삶, 예술은 여러 모순적 요소들이 긴장을 이루고 팽팽한 자기장을 형성했다. 그 속에서 전체와 부분적인 계기들, 구성과 미메시스, 정신과 재료들이 양극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양극, 그러니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어느 하나에 종속되거나 종합되지 않은 채 존재했다. 내가 그린 달콤한 복숭아가 있는 무릉도원은 이 양극을 오가는 역동적 과정 속에 있었다.
<너를 그리고 나는 그리네, 너를 뿌리고 나는 쓰네 >의 시리즈는 2017년부터 제작해 온 연작으로 결핍이 불러들인 욕망이 잠재한 존재하지 않은 사람과 공간을 담고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그려내는 욕망을 현실에 붙들어 놓고 유토피아를 끌어당겼다.
<31일의 밤>는 시리즈는 욕망과 불안이 없는 평온의 세계(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데 의성에서 느낀 평온한 감정들을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렇게 내가 표현한 무릉도원의 자기 기시성(selfreferentiality)은 두 연작 사이 어딘가에 있다. © 2024 박진영
최민경 : 현실화된 유포피아를 꿈꾸며
나는 유화 드로잉 작품에서 무릉도원을 떠나온 원숭이에게 자신을 투영하였다. 이 천둥벌거숭이에게 남은 것은 복숭아 하나와 한 움큼의 도화가 전부이다. 다시 도원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릉도원이세요’의 작업에서는 이세계물(異世界物) 영상을 리믹스하여 재구성하였다.
작가는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를 읽고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을 떠올렸다고 한다.이세계는 다른 세계를 뜻하는 단어로 주인공 캐릭터가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갑자기 이동하여 겪는 일들을 그리는 판타지 서브컬처를 의미한다. 시공간의 이동 혹은 현실 세계에서 사이버 세계로의 이동, 회귀물,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전통은 도화원기와 같은 고전,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욕망은 아닐까...
장소 없는 장소, 어떤 곳도 아닌 곳, 이 몸이 저 몸으로 가는 틈을 매체는 어떻게 표현하고 구현하였는지 작가는 수집하여 이어 붙였다. © 2024 최민경
Chapter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을 꿈꾸는 예술가들
도원명의 도화원기에 나타난 유토피아는 도원명이 죽고 난 이후에도 화자들에게 언급되어 여러 설화들을 만들어냈다. 사실 도원명이 살던 시대는 북위와 같은 이민족들이 중국을 긴 시간 동안 지배하던 시기였다. 도망치거나 그렇지 못한 한족들은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았고 이민족의 침략에 어지러운 전란이 되풀이되면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한족들의 심리 속에서 도원향이라는 유토피아가 나타난 것이다.
안계미술관의 기획전인 <무릉도원> 전시는 의성에 뿌리를 두지 않았던 작가들의 자발적인 전시였다. 그 누구의 요청도 없이, 안계미술관 관장인 김현주 작가의 제안으로 네 명의 작가들은 이 프로젝트를 기쁜마음으로 수행했다.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사비로 재료비와 아티스트 p를 작가들이 책임졌고 안계미술관의 남은 예산으로 홍보물을 제작했다.
지역에서의 문화 예술이 어떠한 형태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 작가들 모두에게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이 한 번의 전시로 거창한 지역문화예술전시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무릉도원을 표현한 예술가들의 언어 속에서 각자의 유토피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술프로그램과 창업으로 지역과 연은 맺고 낙원을 꿈꾸는 작가들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이들은 우리의 실재와 이상 사이의 찰나를 이야기하며 지역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나무는 자란다.
마음속 무릉도원에서 각자의 복숭아나무숲을 가꾸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Chapter 1 : Stay in it?
Yeah.like there, like here.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AI의 기술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계에서는 2022년 주목할 만한 이슈가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에서 열린 미술대회 ‘디지털아트, 디지털합성사진’ 부분에 출품해 1등 상을 받은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이 AI 프로그램 미드저니가 그린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예술이 죽었다”라는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ed)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본질보다 그 겉포장이 중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현상들을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Simulacre Simulation)이라 명명하는데 인간들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왜 만들어 내는 것일까? 보드리야르의 일관된 생각 중 하나는 인간의 활동에 바탕이 되는 힘의 원천을 ‘욕망’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하이퍼리얼한 가상의 세계들은 인간의 욕망의 한 표현이자 극단적인 표현이다.
시뮬라크르는 문화를 소비함으로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인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서사와 이데올로기가 있는지에 따라 형성되는데, 원본의 복제(가상의 현실), 그 복제가 대체 불가의 존재, 원본을 대체하게 된다면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결국 복제물들이 점점 원본을 대체하게 되는 사회가 바로 현대사회이다. 대중에게는 사실 실재(원본)는 중요하지 않다.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2021년 6월,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에서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구찌의 디지털 가방이 무려 4155달러, 한화로 약 460만원이 넘는 금액에 판매가 되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명품 핸드백의 가치가 현실과 버금가게 책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재 거래까지 이루어졌다.
의문이 든다.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와 허구의 세계의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를 다시 봤다. 실제와 가상의 욕망의 세계(상상)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일탈은 상상에서만 머무른다. 칸트의 말대로 각성은 지능이 아닌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월터는 용기를 내고 상상 속의 공간에 머무른다. 영화 초반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명확한 구분이 되지만 주인공의 각성 이후로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간극이 점차 좁혀진다. 주인공은 드디어 무의식의 충동에서 벗어나 실재의 세계로 머무르게 된다.
바로 저곳에서, 바로 이곳에서
무릉도원에 머무르다
: 의성의 매력은 무엇인가?
의성에서 낯선 청년과 대화할때 꼭 빠짐없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 의성 분이세요? 어느 지역에서 오셨어요?”
전시에 참여하는 4명의 작가는 저곳에서 왔다가, 바로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 2023년 의성 마늘축제의 원데이클래스 부스 안에서 우리는 처음 예술활동을 함께 했다. 서로의 작업들을 공유하며 클래스를 운영하던 중 안계미술관의 김현주 관장의 제안으로 4명의 작가들이 함께 기획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왔다. 경기도 고양시, 인천시, 대구시, 경남 산청군 등 각지에서 어쩌다 이곳 의성에 왔는지, 왜 스쳐 지나가지 않고 이곳에 집을 구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수차례 회의에서 어쩌다 의성에 오게 되었는지 우리가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의성은 무(無) 맛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서 좋아요. 사람도 차도” “저는 어딜 가도 딱히 상관없어서요” 등의 생각들이 오고 갔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의성에서 각자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내 머무르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 桃花源記)>에 나오는 말로, ‘이상향(理想鄕)’, ‘별천지( 別天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이 안평대군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도원 즉 복숭아밭을 노니는 환상적인 꿈을 꾼다.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산 아래 이르니,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데 신관 예복 차림의 사람을 만났다. 어렵사리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멀고 가까운 복숭아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떠올랐다. 한 눈에 도원동임을 알아차렸다. 최항, 신숙주도 동행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즐거워하던 중,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다시 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세계를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에게 이야기했고 단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그토록 가고 싶은 무릉도원의 세계는 왼쪽에 그려진 험난한 산세를 넘어 넓고 평평한 도원으로 다다르는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꿈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의성 혹은 누군가에는
영감이 흐르는 무릉도원을 작가들은 각자의 언어로 표현했다.
Chapter 2
무릉도원 : 없거나 혹은 있거나 그 사이의 찰나
김현주 : 이 순간이 어쩌면 나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처음 그려본 복숭아는 둥글면서도 동그랗지 않았고 길고 끝이 뾰족한 잎이 무성했다. 복숭아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경우 겹친 그림자의 색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철마다 즐겨 먹던 복숭아가 이렇게 힘든 모양이었나? 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 내 눈이 어떻게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고 관계를 만들고 색을 선택하는지가 행위의 주된 관심이다. 겹겹이 쌓이는 오일의 물성이 환영 비슷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좋아한다.
Colorless Peaches는 꿈속 무릉도원을 방문했을 때 손 내밀어 따먹을 나만의 무색무취의 복숭아다. 3면화로 그려진 Peach Blossoms은 구글에서 찾은 복숭아 꽃을 확대하고 잘라낸 이미지로 구성되어있다. 평소 쓰지 않던 Cerulean Blue 와 Quinacridone Red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였다. 삶과 죽음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벚꽃이 흐드러지는 장면에 빗대어 표현한 장면은 역사 속 페인팅에도 많았고 최근 데미안허스트의 벚꽃회화 작품들도 인상적이었다. 의성에 온 초기 복숭아밭 근처를 다녀온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 자연이 지천으로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느낌. 정리 안 된 구도와 색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것들만 그리고 살아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작업했다.
Pink Freud는 200호 대형화로 얼굴 없는 사람이 복숭아꽃 만발한 나무 아래 있는 작품이다. 이탈리아 문학가 레오파르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쁘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나쁘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나쁜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중략) 유일한 좋은 것은 비존재이다.’라는 문장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무릉도원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200호 캔버스를 무리 없이 제작하는 작업실에서 이태리산 아사천과 작은 튜브당 6만 원이 넘는 시리즈8의 윌리엄스버그 유화 물감을 마음대로 낭비하는 이 순간이 어쩌면 나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 2024 김현주
노수현 : 나는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며 애정할 것이다.
분홍빛과 붉은빛이 섞인 껍질을 반으로 가르면, 노란 속살이 나오고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씨앗. 씨앗을 제거하면 움푹한 홈이 생긴다. 아무도 그 홈을 채우지 않는다. 처음부터 씨앗이 없던 것처럼 움푹한 공간을 받아들인다. 씨앗에 짓눌려 노란색이 아닌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는 그 홈을 받아들인다. 만약 반으로 가른 복숭아 속에서 씨앗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홈을 무시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자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대로 두자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복숭아가 건강한 복숭아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복숭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씨앗이 없는 복숭아를 보며 사람들은 열띤 토론을 벌일 것이다. 이 문제 있는 복숭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문제가 왜 생긴 것인지, 씨앗은 어디 간 것인지, 씨앗이 없는 저 홈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거대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할 것인지. 다른 복숭아에서 빼낸 씨앗을 억지로 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복숭아의 다른 속살을 베어내 홈을 메워버릴 수도 있다. 물을 채워 넣을 수도 있고, 복숭아와 전혀 관련 없는 생뚱맞은 것으로 메워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시행하기 위해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 얼마나 많은 인력이 들 것인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홈이 얼마나 큰 구멍이 될 것인지, 혹은 복숭아 스스로 그 공간을 채워버릴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는 복숭아도 복숭아라고 말하는 이들은 씨앗을 잃어버린 복숭아가 비어 버린 공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홈을 채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복숭아 중심에 있는 그 홈이 스스로 재생되는 과정을 함께할 것이다. 노란빛 가운데 붉게 빛나는 그 공간을 나는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며 애정할 것이다. 애정의 크기가 커지면 그 홈은 더 이상 홈이 아닌 복숭아가 될 것이다. © 2024 노수현
박진영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 ‘그 곳’
어떤 장소에 머물더라도 나의 도원향은 기억 속에 있는 이곳과 저곳이 혼재한 ‘그곳’ 이다.
그렇기에 이 원본이 없는 이상향은 욕망할수록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고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에 대한 궁금증은 나의 욕망은 무엇인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곳’은 가시적이지 않기에 무한한 상상을 기대감을 때로는 공포와 무력감을 동반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내가 38년을 살고 활동하던 지역을 벗어나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 작가를 포기했음에도 표면적으로 나는 작가로 불렸다. 나의 작품들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듯 나는 과거의 나를 복제해서 머물렀다. 이곳에서의 삶, 예술은 여러 모순적 요소들이 긴장을 이루고 팽팽한 자기장을 형성했다. 그 속에서 전체와 부분적인 계기들, 구성과 미메시스, 정신과 재료들이 양극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양극, 그러니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어느 하나에 종속되거나 종합되지 않은 채 존재했다. 내가 그린 달콤한 복숭아가 있는 무릉도원은 이 양극을 오가는 역동적 과정 속에 있었다.
<너를 그리고 나는 그리네, 너를 뿌리고 나는 쓰네 >의 시리즈는 2017년부터 제작해 온 연작으로 결핍이 불러들인 욕망이 잠재한 존재하지 않은 사람과 공간을 담고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그려내는 욕망을 현실에 붙들어 놓고 유토피아를 끌어당겼다.
<31일의 밤>는 시리즈는 욕망과 불안이 없는 평온의 세계(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데 의성에서 느낀 평온한 감정들을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렇게 내가 표현한 무릉도원의 자기 기시성(selfreferentiality)은 두 연작 사이 어딘가에 있다. © 2024 박진영
최민경 : 현실화된 유포피아를 꿈꾸며
나는 유화 드로잉 작품에서 무릉도원을 떠나온 원숭이에게 자신을 투영하였다. 이 천둥벌거숭이에게 남은 것은 복숭아 하나와 한 움큼의 도화가 전부이다. 다시 도원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릉도원이세요’의 작업에서는 이세계물(異世界物) 영상을 리믹스하여 재구성하였다.
작가는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를 읽고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을 떠올렸다고 한다.이세계는 다른 세계를 뜻하는 단어로 주인공 캐릭터가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갑자기 이동하여 겪는 일들을 그리는 판타지 서브컬처를 의미한다. 시공간의 이동 혹은 현실 세계에서 사이버 세계로의 이동, 회귀물,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전통은 도화원기와 같은 고전,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욕망은 아닐까...
장소 없는 장소, 어떤 곳도 아닌 곳, 이 몸이 저 몸으로 가는 틈을 매체는 어떻게 표현하고 구현하였는지 작가는 수집하여 이어 붙였다. © 2024 최민경
Chapter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을 꿈꾸는 예술가들
도원명의 도화원기에 나타난 유토피아는 도원명이 죽고 난 이후에도 화자들에게 언급되어 여러 설화들을 만들어냈다. 사실 도원명이 살던 시대는 북위와 같은 이민족들이 중국을 긴 시간 동안 지배하던 시기였다. 도망치거나 그렇지 못한 한족들은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았고 이민족의 침략에 어지러운 전란이 되풀이되면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한족들의 심리 속에서 도원향이라는 유토피아가 나타난 것이다.
안계미술관의 기획전인 <무릉도원> 전시는 의성에 뿌리를 두지 않았던 작가들의 자발적인 전시였다. 그 누구의 요청도 없이, 안계미술관 관장인 김현주 작가의 제안으로 네 명의 작가들은 이 프로젝트를 기쁜마음으로 수행했다.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사비로 재료비와 아티스트 p를 작가들이 책임졌고 안계미술관의 남은 예산으로 홍보물을 제작했다.
지역에서의 문화 예술이 어떠한 형태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 작가들 모두에게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이 한 번의 전시로 거창한 지역문화예술전시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무릉도원을 표현한 예술가들의 언어 속에서 각자의 유토피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술프로그램과 창업으로 지역과 연은 맺고 낙원을 꿈꾸는 작가들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이들은 우리의 실재와 이상 사이의 찰나를 이야기하며 지역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나무는 자란다.
마음속 무릉도원에서 각자의 복숭아나무숲을 가꾸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